Part 2. 1970~1980년대: 공장에서 태어난 국민 과자,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다 : 새우깡의 탄생
"100원으로 만난 바삭함, 새우깡에서 보리차까지"
경제 성장과 함께한 과자 대중화
"1970년대, 대한민국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중화학 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대였다. 가정에 TV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과자를 사 먹으며 행복을 느꼈다. 이 시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과자들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철근 콘크리트보다 바삭했던 새우깡, 한국인의 혀를 사로잡은 과자 혁명의 현장으로 떠나보자."
1. 1971년, 농심의 혁명: 새우깡이 바꾼 한국 과자 역사
1) 탄생 배경: 볶음과자의 등장
기술적 도전
1960년대까지 한국 과자는 대부분 튀긴 밀가루(산도)나 엿(땅콩강정)이 주류였다. 농심은 일본의 기술을 도입해 압출성형(Extrusion) 방식을 최초로 적용, 밀가루 반죽을 고압으로 성형해 볶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는 당시로선 첨단 식품 공학 기술이었다.
이름 유래 논쟁
공식적으로는 새우 모양 + ‘깍둑썰기(깡)’에서 유래했지만, 내부 직원들은 "새우 깡 놈들도 먹을 만큼 맛있다"는 속설을 농담처럼 전하기도 했다.
2) 마케팅 전략: TV CF와 시대정신
첫 TV 광고
1973년 MBC에서 방영된 CF는 "바삭바삭 새우깡, 영양 가득한 새우깡!"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자를 건네는 장면으로 구성됐다. 당시 CF 제작비는 500만 원(현재 가치 약 1억 원)으로, 파격적 투자였다.
사회적 반향
1975년 새우깡 한 봉지 가격은 50원(라면 1개 100원)으로, 서민층도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1978년 연간 생산량은 1억 2천만 봉지를 돌파하며 국민 과자로 자리매김했다.
3) 논란과 진화: 새우 함량 사태
1982년 소비자 고발
광고에서 "진짜 새우 12% 함유"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검출량은 6%로 드러나 소비자 단체의 항의를 받았다. 이는 한국 소비자 운동의 시발점 중 하나로, 1987년 소비자보호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현재의 새우깡
2023년 기준 새우 추출물 함량은 8.7%로 조정됐고, 인공 조미료 대신 천연 발효액을 사용한다.
2. 1970~80년대를 풍미한 3대 국민 과자
1) 산도 (롯데제과, 1963년)
기술적 특징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튀긴 후 소금 간한 과자. 일본 "카키노타네"와 유사하나, 더 두꺼운 식감이 특징이다.
문화적 아이콘
1982년 배우 이순재가 출연한 CF에서 "산도는 역시 롯데"라는 대사는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생산 중단과 부활
2000년대 생산 중단됐다가 2019년 한정판으로 재출시되며 40~50대 추억 마케팅에 성공했다.
2) 꿀꽈배기 (해태제과, 1975년)
제조 비화
당시 해태제과 연구원이 일본 출장 중 먹은 "아메리카야키"(꿀 튀김 과자)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했다. 꽈배기 모양은 반죽을 손으로 비틀어 만드는 수공정이었지만, 1980년대 자동 트위스팅 머신 도입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영양 논란
1980년대 한 연구에서 "꿀꽈배기 1개(30g)의 당류는 어린이 일일 권장량의 70%"라는 결과가 나와 학부모들의 우려를 샀다.
3) 오징어집 (농심제과, 1980년)
과자계의 블록버스터
감자전분으로 만든 오징어 모양 과자로, "오징어다!"라는 CF 대사가 유행했다. 1985년 연간 매출 120억 원(현재 가치 약 1,200억 원)을 기록하며 크라운제과를 업계 1위로 끌어올렸다.
비밀 재료
오징어 추출물 대신 미역 추출물을 사용해 해산물 풍미를 냈다. 이는 원가 절감과 동시에 독특한 맛을 창출한 전략이었다.
3. 과자 산업의 숨은 주역: 포장 기술의 발전
1) 방습 필름의 혁명
1970년대 초기 과자 포장은 종이봉지였으나, 습기로 인해 쉽게 눅눅해졌다. 1978년 알루미늄 래미네이트 필름 도입으로 유통기한이 3개월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2) 광고 문구의 변천
1970년대: "영양 가득" (단백질·비타민 강조)
1950~70년대에 과자 광고에서 영양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195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회복기였고, 한국은 **한국전쟁(1950~1953)**으로 인해
심각한 식량 부족과 영양 결핍 문제가 있었다.
서구 국가들도 전쟁 직후 식량 배급제가 시행될 정도로 충분한 영양 섭취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을 보충해 주는 과자"**라는 메시지는 소비자에게 매우 매력적인 마케팅 요소였다.
출산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여 '성장기 필수 영양소'가 들어있다는 말은 마케팅의 필수요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서구문화에 대한 반발감이 심해 공장형 가공식품을 판매하기 어려웠던 기업들에겐 이만큼 필요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바삭한 맛" (식감 마케팅)
1990년대: "추억의 맛" (감성 마케팅)
4. 당시 소비자 체험기: "학교 앞 문방구는 천국이었습니다"
가격 변동사
1971년 새우깡: 50원 → 1989년: 200원 (물가 상승률 300%)
구매 방식
아이들은 100원 동전으로 과자 2개를 사거나, 50원짜리 "반 봉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추억의 장소
서울 종로의 "동아상회", 부산 광복동의 "어린이 과자점"이 전국 체인점처럼 번성했다.
5. 일본 vs 한국: 과자 전쟁의 서막
1) 일본 과자 침략
1970년대 후반 칼비 "에비스코", 그리코 "포키"가 수입되며 국내 업체들과 경쟁했다.
2) 한국의 반격
- 맛 차별화: 일본 과자가 단맛 위주일 때, 한국은 매콤한 맛(꼬북칩), 짠맛(새우깡)으로 차별화했다.
- 가격 경쟁력: 일본 과자 300원 vs 한국 과자 100원.
6. 1980년대, 위기와 도전: 군사정권과 원료 대란
1980년 설탕 파동
제2차 오일쇼크로 설탕 수입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과자 업체에 감미료(사카린) 사용을 강제했다. 이 시기 과자들은 "쓰라린 달콤함"이란 오명을 쓰기도 했다.
1988년 올림픽 특수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농심·롯데가 영문 포장 과자를 최초로 출시했다.
다음 편에서는? 공장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1970년대 과자는 경제 성장의 상징이자 서민의 작은 사치였다. 다음 편에서는 1990년대, 외국 브랜드와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태어난 K-과자들의 반격을 소개한다. 포카칩의 등장, 빼빼로 데이의 탄생, 과자 산업의 글로벌 도전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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